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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은 글 중 가장

Author
chloebringsjoy
Date
2021-06-15 23:07
Views
418

차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근래 읽었던 글 중 가장 '아차'하면서 읽었던 글이었다.





조국대전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던 2019년 가을 어느날. 조국의 딸 조민이 tbs 뉴스공장에 등장했다. 이날 조민은 자신에게 집중된 입시비리 의혹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풀어냈던 이날의 해명들은 훗날 재판에서 완벽한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났다. 뻔뻔한 거짓말보다 나의 심박수를 더 끌어올린 그의 발언이 있었다. 조민은 대학 입학이 취소되어 고졸이 되면 어쩔거냐는 김어준의 신파성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억울하긴 하지만 자기는 고졸이 돼도 상관없다고. 서른에 의사가 못되면 마흔에 되면 그만이라고 덤덤히 말했다.

"니가 조민이니까 그렇지" 육성으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당신이 조민이니까, 당신 아빠가 조국이니까, 엄마가 정경심이니까 가능한 말인 것이다. 초고도경쟁사회에서 10년 뒤에 직업을 가져도 될만큼 여유로운 인생은 특별하다. 수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문제로 박탈감을 호소하던 그때 조민은 방송에 나와 사과 대신 자신의 우아한 인생에 관해 말한 것이다.

조민이 악의를 갖고 그런 말을 뱉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진심에 가까운 소회였을 것이다. 이날 조국의 지지자들은 조민의 우아한 인생관을 들으며 "호랑이 새끼는 역시 호랑이"라며 몹시 고무되었다.

아래 영상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조민과는 조금 다른 청춘을 보냈다. ‘너 정도 성적이면 인문계 가서도 충분히 잘할 거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며 배를 탔던 청춘. ‘공부하고 싶으면 집 팔아서라도 대학 보내줄게’라고 말하는 부모에게 집팔면 우리가족 어디서 사냐며 실업계 진학을 선택한 청춘. 이들은 조민의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위 조민의 말에 조국사태의 본질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0년 뒤에 꿈을 이루어도 괜찮은 사람과 당장을 살기 위해 꿈 같은 건 생각도 못해본 사람 사이의 긴장.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채 했던 이 세계의 질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 불편함은 조민의 책임이 아니다. 가장 무거운 책임은 두 세계의 격차를 외면해온 정치에 있을 것이다. 조국 일가의 모순을 맹비난했던 정치인 중에 이준석이 있다.

이준석은 표면적으로 조민의 세계와 격렬하게 갈등하는 이름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둘의 세계는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준석은 2019년 자신의 저서에서 “좋은 집안과 엘리트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실력 혹은 능력이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나를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도 말했다. 공부를 잘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취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청년들에게 이준석이 말한 ‘실력’이란 무엇을 뜻할까.

투철한 능력주의자 이준석은 영상 속 청년들이 아니라 조민의 우아한 경쟁을 응원한다. 단지 불법만 아니라면. 이준석의 관심사는 조민과 청년들의 삶이 아니라, 반칙이 제거된 경쟁의 룰 자체이다. 반칙만 잡아낼 수 있다면 그들 사이에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이준석이 말하는 공정이란 아빠가 조국인 학생과 아빠가 조국이 아닌 학생들이 인생을 두고 벌이는 건곤일척의 승부다. 살면서 한번도 마음껏 애였던 적이 없었다 말하는 청년과, 앞으로 10년간 더 ‘애’일 수 있는 사람의 대결. 어떤 외부의 개입도 없는 순수한 야생의 승부.

영상에서 청년은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춘기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청년에게 이준석의 정치는 이렇게 응답한다. '아니다. 너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 세계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더욱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만들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한다.

이준석의 정치를 두고 희망을 말하는 어른들에게 비애를 느낀다. 나는 그로 인해 나타날 부수적인 정치의 변화를 기대하면서도, 차마 그의 등장을 긍정적으로 말하지 못하겠다. 아래 글은 영상에 출연한 청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은 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들에게 이 청년의 말과 글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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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은 질서를 깨뜨리고 정치를 바꾼다. 기존의 보수정치도 세상의 합의를 대놓고,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못했다. '서민'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고,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게 언제나 그들의 언어였다. 이준석의 정치는 다르다. 위선을 떨지 않는다. 이준석은 약자를 위하는 척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런 거리낌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능력 없는' 이들의 삶을 짓밟는다.

이준석은 우리가 힘겹게 쌓아온 평등의 약속을 '공식적으로' 비웃는다. 대학 간판 자랑하는게 뭐 어때서? 내 능력이 뛰어난데 왜 양보 해야하는데? '공정'하게 '경쟁'했으니 책임은 각자 지는게 맞잖아? 이 사회에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시정될 이유도 없다. 똑같은 시험지를 쥐어주는 것이 정의고, 공정한 경쟁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그의 세계관이다.

이준석의 정치는 온갖 수사와 겉치레를 빼고 남은 정확한 알맹이다. 약육강식, 무한경쟁, 능력주의, 신자유주의... 뭐라고 부르던 그 시꺼먼 알맹이 자체가 정치인 이준석이다. 그리고 오늘 그 노골적인 알맹이가 세상으로부터 승인됐다. 힘이 든다. 다가올 세상이 두렵다. 이런 세대교체가 절망스럽다.


- 정주식님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