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eous (한 + EN)
근대적 여성
Author
chloebringsjoy
Date
2019-11-11 21:03
Views
1623
때는 바야흐로 1920년대 중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여학생이 전체 여성 인구 만 명당 0.38명에 불과하고, 전체 학생 중 여학생의 비율 역시 여성인구의 2% 미만이던 시절.
남성위주의 신문사 분위기 속에서 여성 기자는 "생색으로 채용하는 것"에 불과했고 "신문사마다 단지 한 명 정도씩 채용했던 여기자를 '화초기자'라고 부르던" (신여성 1933년 12월호, 개벽 1935년 3월호) 시절.
신보에서 기자 공개 채용시 "가장 (家長) 있는 부인", 즉 기혼자를 응시조건 가운데 하나로 내걸고, 여기자에게는 가정방문이니 학예방면이니 같은 '문화'면 (가뎡, 소년소녀란, 부인란) 의 취재만을 허용하면서도 대부분 1-2년 밖에 활동하지 못하게끔 하던 시절.
기자라는 지위를 활용해 끊임없이 여성 활동을 지속해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허정숙이다.
허정숙은 수가이 (sky, 秀嘉伊) 라는 필명을 이용해, 1924년 11월 동아일보에 <여성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우리는 남의 아내와 남의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한갓 그 집안 시부모와 그 남편 한 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개성을 살리우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람에게 의뢰하여 사는 기생충이 아니고 완전한 사람이며 한 세상의 인간살이가 남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함이라 하면 우리는 먼저 남과 같이 완전히 자유롭게 살 것을 요구할 것이며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이 선각자인 신여성들의 맹렬히 부르짖음이 있고 굳세게 싸움이 있다.” (동아일보 블로그의 글에서 발췌)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남편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를 사직하였지만, 주세죽은 조선여성동우회 활동을 계속 하면서 당시 사회주의 여성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사회주의 여성 해방론을 펼쳐 나갔다.
1925년께 세 명의 여성이 단발을 하고 청계천에서 찍은 사진(기사 내 사진 참조)은 근대 여성 해방론의 정점과도 같은 사진인데, 바로 근대판 탈코르셋인 “여성 단발”을 직접 체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의 단발과 단발전후> (개벽사 신여성, 1925년 10월) 의 원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첫 쪽만 옮겨본다면,
“여자의 단발! 이것이 아무 별 문제 거리가 되지 안음도 불구하고 일반인심은 <단발> <단발>하고 여기저기서 한 이야깃거리가 되여 잇는듯합니다. 단발 이것이 재래의 풍속에 빗대여 일종의 반역이라고 볼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단발 그것이 일반의 여론을 일으킬 그런 괴상하고 망칙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금까지 여자는 꼭 결발 (結髮) 하여온 것 그것이 결코 원시시대로부터 일정한 규율 밑에서 반드시 여자는 머리를 길게 늘이는 것이 옳다는 그런 정의는 없었습니다 습관, 풍속이라는 것은 시대를 따라서 자연의 추세로 변천되는 것입니다. 예전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 여자가 산발하고 잇다가 그것이 또 인문의 발달을 따라 산발보다 편발이 좋음을 깨닫고 스스로 변해 일종의 습관이 되고 일반의 풍속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비단 여자의 편발이나 단발뿐이 아니라 세상에 모든 사물과 풍속은 시대를 따라 필연으로 차차 변하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어 말하면 지금부터 한 오십 년 전 우리 조선뿐 아니라 동양에서는 남자의 삭발은 일종의 괴이한 행사 중 하나로 단발하는 이는 다소간의 박해를 밧고 또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간 금일에 있어서는 단발은 일종의 풍속이 되어버리고 그 당시에 일반의 풍속으로 비난 받지 않는 장발이 도리어 일반의 치소 거리가 되고 비난거리가 되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안목과 사상은 천양지차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
참고 1. 1920년 후반에 벌어졌던 단발 논쟁 당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들은 "민(民)에 가까이 가는 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하여 자신들이 주장하는 단발을 버리고 다시 원래 머리 모양으로 돌아갔다.
참고 2.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나의 단발과" 를 쳤는데, 주세죽, 허정숙, S모 양의 글이 나온다. <여자의 단발: 나의 단발 후 감상>,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 <나의 단발과 단발전후> 라는 글이 나온다. 이 글들은 1925년 8월과 10월에 발행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2017년 7월에 비치되었다.
참고 3. "허정숙은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계파 숙청이 시작되자 전 남편 최창익을 비판하며 살아 남았다. 최창익은 이 때 처형됐다. ... 분단 후 북에서 활동한 허정숙은 앞서 나혜석이 힘겹고도 짧은 삶을 살다 간 것과 달리 탄탄대로를 걸으며 장수하다 생을 마감했다. 허정숙은 북한의 내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을 거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설회의 부의장, 당 중앙위 정치국 비서,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91년 6월 5일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 당시에도 수많은 직책을 달고 있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는 후문이다." (한병관, 일요신문, July 2018)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여학생이 전체 여성 인구 만 명당 0.38명에 불과하고, 전체 학생 중 여학생의 비율 역시 여성인구의 2% 미만이던 시절.
남성위주의 신문사 분위기 속에서 여성 기자는 "생색으로 채용하는 것"에 불과했고 "신문사마다 단지 한 명 정도씩 채용했던 여기자를 '화초기자'라고 부르던" (신여성 1933년 12월호, 개벽 1935년 3월호) 시절.
신보에서 기자 공개 채용시 "가장 (家長) 있는 부인", 즉 기혼자를 응시조건 가운데 하나로 내걸고, 여기자에게는 가정방문이니 학예방면이니 같은 '문화'면 (가뎡, 소년소녀란, 부인란) 의 취재만을 허용하면서도 대부분 1-2년 밖에 활동하지 못하게끔 하던 시절.
기자라는 지위를 활용해 끊임없이 여성 활동을 지속해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허정숙이다.
허정숙은 수가이 (sky, 秀嘉伊) 라는 필명을 이용해, 1924년 11월 동아일보에 <여성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우리는 남의 아내와 남의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한갓 그 집안 시부모와 그 남편 한 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개성을 살리우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람에게 의뢰하여 사는 기생충이 아니고 완전한 사람이며 한 세상의 인간살이가 남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함이라 하면 우리는 먼저 남과 같이 완전히 자유롭게 살 것을 요구할 것이며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이 선각자인 신여성들의 맹렬히 부르짖음이 있고 굳세게 싸움이 있다.” (동아일보 블로그의 글에서 발췌)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남편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를 사직하였지만, 주세죽은 조선여성동우회 활동을 계속 하면서 당시 사회주의 여성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사회주의 여성 해방론을 펼쳐 나갔다.
1925년께 세 명의 여성이 단발을 하고 청계천에서 찍은 사진(기사 내 사진 참조)은 근대 여성 해방론의 정점과도 같은 사진인데, 바로 근대판 탈코르셋인 “여성 단발”을 직접 체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의 단발과 단발전후> (개벽사 신여성, 1925년 10월) 의 원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첫 쪽만 옮겨본다면,
“여자의 단발! 이것이 아무 별 문제 거리가 되지 안음도 불구하고 일반인심은 <단발> <단발>하고 여기저기서 한 이야깃거리가 되여 잇는듯합니다. 단발 이것이 재래의 풍속에 빗대여 일종의 반역이라고 볼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단발 그것이 일반의 여론을 일으킬 그런 괴상하고 망칙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금까지 여자는 꼭 결발 (結髮) 하여온 것 그것이 결코 원시시대로부터 일정한 규율 밑에서 반드시 여자는 머리를 길게 늘이는 것이 옳다는 그런 정의는 없었습니다 습관, 풍속이라는 것은 시대를 따라서 자연의 추세로 변천되는 것입니다. 예전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 여자가 산발하고 잇다가 그것이 또 인문의 발달을 따라 산발보다 편발이 좋음을 깨닫고 스스로 변해 일종의 습관이 되고 일반의 풍속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비단 여자의 편발이나 단발뿐이 아니라 세상에 모든 사물과 풍속은 시대를 따라 필연으로 차차 변하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어 말하면 지금부터 한 오십 년 전 우리 조선뿐 아니라 동양에서는 남자의 삭발은 일종의 괴이한 행사 중 하나로 단발하는 이는 다소간의 박해를 밧고 또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간 금일에 있어서는 단발은 일종의 풍속이 되어버리고 그 당시에 일반의 풍속으로 비난 받지 않는 장발이 도리어 일반의 치소 거리가 되고 비난거리가 되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안목과 사상은 천양지차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
참고 1. 1920년 후반에 벌어졌던 단발 논쟁 당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들은 "민(民)에 가까이 가는 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하여 자신들이 주장하는 단발을 버리고 다시 원래 머리 모양으로 돌아갔다.
참고 2.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나의 단발과" 를 쳤는데, 주세죽, 허정숙, S모 양의 글이 나온다. <여자의 단발: 나의 단발 후 감상>, <나는 단발을 주장합니다>, <나의 단발과 단발전후> 라는 글이 나온다. 이 글들은 1925년 8월과 10월에 발행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2017년 7월에 비치되었다.
참고 3. "허정숙은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계파 숙청이 시작되자 전 남편 최창익을 비판하며 살아 남았다. 최창익은 이 때 처형됐다. ... 분단 후 북에서 활동한 허정숙은 앞서 나혜석이 힘겹고도 짧은 삶을 살다 간 것과 달리 탄탄대로를 걸으며 장수하다 생을 마감했다. 허정숙은 북한의 내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을 거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설회의 부의장, 당 중앙위 정치국 비서,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91년 6월 5일 아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 당시에도 수많은 직책을 달고 있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다는 후문이다." (한병관, 일요신문, July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