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ellaneous (한 + EN)
거창할 필요 없는 윤리
Author
chloebringsjoy
Date
2021-03-0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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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 경향신문에 성소수자를 비롯한 젠더 보도가 많다는 지적을 받으면 늘 고민하곤 한다. 아마 세상에서 체감하는 성소수자의 존재보다 언론매체에서 접촉하는 성소수자의 위상은 훨씬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신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똑똑한 활동가들이며, 홍석천씨처럼 성공한 연예인, 사업가이기도 하다. 여성 이슈도 비슷한데 ‘젠더이슈 = 먹고 살 길이 해결된 중산층이 지적 유희나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할 목적으로 관심 갖는 이슈’란 이미지도 생겨나고 가장 낮은 곳이라면서 공격이 들어오기도 한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한층 더 들어가서,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싸워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여성이 되고 싶다’ 내지 ‘나는 여성이다’란 선언에 당혹스럽고 적대감을 갖기도 한다. 신문기자가 되기 훨씬 전 나도 그런 생각들을 해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정리됐는데 어떤 모습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억압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이란 걸 주변의 극소수만 안다는 것이 가져오는 외로움과 고립감은 내가 상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모르는 것 앞에서는 말을 아끼고 듣는 게 거창할 필요 없는 윤리 아닐까.
정서적 고립감이 가벼운 문제라는 것이 아니지만, 그 전에 성소수자들은 경제적으로 불안하다. 사회제도가 정상가족에 맞춰져 있기에 고소득 전문직 아니면 1인 가구나 비혼가구는 기본적으로 불안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성소수자들은 더 불안하다. 노동현장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노동이력에도 영향을 준다. 물론 성소수자 중에서도 전문직 등 잘 사는 사람이 있겠지. 전체 인구에 그런 사람들의 비율이 있는 것처럼. 노동과 젠더의 문제가 연결되는 지점인데, 노동에서의 불평등 이슈를 일단 해결하고 젠더 등 나머지 이슈를 해결하자는 이야기가 여기서 어긋난다. 정상과 비정상을 만들고 정상에 맞춰 임금격차로 잇는 것이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방식이고 그게 노동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각종 불평등과 싸우는 것, 정상의 범주를 넓혀가는 것이 가장 좋은 불평등 대책이다. 그래서 싸움의 전선에 성소수자들이 많이 선다. 모든 성소수자들이 그렇게 살지 않더라도. 그 싸움은 모든 이들을 전진시킬 것이다. 기사의 양보다 그런 현실을 드러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일주일 전 김기홍씨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이름이 익숙하다 생각했다. 사진을 보니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언론기고나 기자회견 등등 얼굴을 많이 비춰서 익숙했디. 누구나 자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히 더 많이 죽는 사람들이 있다. 성소수자. 그리고 어떤 싸움의 맨 앞대열에 선 사람들. 이 기사의 제목처럼, 남에게 꾸준히 희망을 말하던 사람들은 에너지를 다 쓰고 전사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일주일 만에 변희수 하사의 죽음 소식을 듣는다.
죽음의 원인을 여전히 함부로 단정해선 안 되겠지만, 이 기사에 나온 여러가지 현실들이 최전방의 누군가를 밀어 넘어뜨리는 것이 아닐까. 사회의 실패란 이런 것. 참담한 저녁이다. 부디 차별과 폭력없는 세상에 가 있기를. 김기홍씨도, 변희수씨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 박은하 (March 3, 2021). Facebook.